[조맹기 논평] “김일성이 농락한 대한민국 건국” 그리고 그 후.
- 자언련

- 2023년 5월 17일
- 3분 분량
광화문이 건설노동자의 해방구가 되었다. 조선일보 김광진·정해민·오유진 기자(05.17), 〈민노총, 서울 도심 막고 ‘술판’ 노숙 집회〉, 동 신문 최훈민 기자(05.17), 〈분신 노조원 불붙일 때 민노총 간부 안 막았다.〉, 또 5·18이 내일이다. 시체팔이로 한건 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일련의 일들은 서로 관계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유독 5·18이 되니 기사화가 된다. 그 문화임에 틀림이 없다. 평산마을이 문전성시이다. 중앙일보 인혜리 논설위원(05.17), 〈문 전 대통령이 연 ‘평산책방’가 보니-‘주민 위한 책방’(문 전 대통령의 발언)에는 마을 주민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마침 5·18 때이다.
경향신문 문재원 기자(05.17), 〈5·18 진상규명위 “계엄군, 최소 50여회 발포…총상 사망자 135명”〉, 언론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최소 20곳 이상에서 50여 차례에 걸쳐 발포한 사실이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진상규명위) 조사 결과 드러났다. 계엄군에 의해 죽은 희생자 166명 중 135명은 총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파악됐다. 진상규명위는 16일 서울 중구 진상규명위 대강당에서 마지막 대국민 보고회를 열고 “군의 5·18 진압작전을 재구성하고, 총상에 의한 사망자와 부상자들을 지도상에 표기해 분석한 결과 1980년 5월 계엄군이 광주와 전남 등 지역 최소 20곳에서 50여회 총 등 무기를 발포한 것으로 파악했다”고 밝혔다. 시민을 향한 계엄군의 구체적인 총격 횟수가 국가기관 조사를 통해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하은정 한변 부산지부장은 카톡(05.16)에서 “현성삼 변호사/한변, ‘518 사망자는 총 193명, 그 중 총상으로 인한 사망자는 128명입니다. 전체 193명 사망자 중 민간인은 166명 사망자 중 민간인은 166명, 군인 23명, 경찰 4명입니다. 최초 검시자료에 다르면 m16에 의한 총상 사망자는 29명 있고 그 중 대부분은 광주교도소 습격 중에 교도소를 지키고 있던 진압군이 망루에서 조준사격하여 발생한 사망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료들은 모두 없어지고 한겨레와 mbc 보도 자료만 올라와 있네요. 이런 식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데이터자료까지 바뀌버리는 군요”
문화일보 이용식 주필(05.15), 〈퇴행하는 ‘5·18 광주’〉, “박서보(92) 화백은 살아있는 한국 현대미술사(史)로 불리는 세계적 예술가다. 제14회 광주비엔날레 개막식이 지난달 6일 ‘제1회 박서보 예술상’ 시상식과 함께 열렸다. 그런데 비엔날레 재단은 상을 폐지하고 기탁금은 돌려주기로 했다. 광주 미술계가 “4·19 혁명에 침묵하고 5·16 정권에 순응한 인물로, 광주 정신에서 출발한 비엔날레 취지에 어긋난다”고 한 데 따른 조치다. 민주화 투쟁 경력이 없으면 함께할 수 없다는 황당한 발상이다. 문재인 정부가 ‘국제행사 국비 지원 일몰제’ 예외를 적용토록 기획재정부 규정까지 개정해 영원히 세금을 지원받게 됐음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데도 전국적 관심은 시들하다. 다른 지역의 많은 사람이 ‘광주니까 그럴 만하다’며 지나친다는 의미다. 광주비엔날레는 1995년 시작 때에 비해 ‘광주의 비엔날레’ 수준으로 위축됐다. 광주시장 초청에도 김건희 여사의 개막식 참석은 무산됐다. 이번 일로 순수 예술전과 더 멀어졌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광주 5·18’에 큰 빚을 졌다. 지금 60대 초중반인 77∼80학번 세대는 더 특별한 집단기억을 갖고 있다. 당시 구전(口傳)과 지하 유인물로 참상이 전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이런 한(恨)들을 승화시킨 지도자가 김대중(DJ) 대통령이다. 5·18 내란 음모 혐의로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DJ는 1997년 대통령 당선 직후 전두환·노태우 사면에 앞장서고, 취임 뒤 청와대로 초청했다.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결정한 뒤 국고 200억 원을 지원했으며, 기념사업회 명예회장도 맡았다. DJ는 줄곧 “피해 당사자가 화해 적임자”라면서 보복의 악순환을 막아 “역사의 진일보”를 이루자고 했다. DJ의 ‘영원한 비서실장’ 권노갑(93)은 인터뷰에서 “반성과 사과가 없어도 용서와 화해를 추구했던 것이 DJ의 위대함”이라면서 “살아계셨다면 전두환 빈소에도 조문했을 것”이라고 말했다.(시사저널 2022년 3월 18일)”
탈원전도 문제가 된다. 조선일보 양지호·김승재·이기우 기자(05.17), 〈‘탈원전’ 문미옥은 과기정책원장...한전공대法 신정훈, 양곡법 주도〉, 한전에 부담 떠넘긴 그때 그 사람들 김수현(사회수석겸 에너지전환TF 팀장), “문미옥 과학기술 보좌관, 강기정 정무수석, 이낙연 전남지사, 김태년 정책위의장, 신정훈 의원, 백운규 산업부 장관, 성윤모 산업부 장관,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 등이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자유주의 시장경제 등 헌법정신과 다른 것이 어디에서 근원이 있을까? 이성과 합리성과는 거리가 멀 것은 당연하다. 조선일보 박종인 선임기자(05.17), 〈소련 꼭두각시 김일성이 농락한 대한민국 건국[박종인의 땅의 歷史]〉, “1945년 8월 15일 35년 식민 시대가 끝났다. 새 나라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벌어졌다. 미국에서 외교투쟁을 벌이던 이승만이 귀국했다. 중국에서 투쟁하던 임정요원들이 귀국했다. 국내파 독립운동가들도 저마다 비전을 내세우며 건국 주체임을 주장했다. 거기에 소련군 소속 조선인 장교 하나도 끼어 있었다. 소련 제88정찰여단 대대장 김일성이다. 서른셋 먹은 이 소련군 대위가 건국 주도 대열에 포함되면서 건국을 향하던 대한민국 진로는 험로(險路)로 변했다. 그런데 이 김일성이 한 일들은 스스로 계획한 일들이 아니었다. 테렌티 스티코프라는 당시 북한 진주 소련군 군사위원이 갓난애기 이유식 떠먹여주듯 했던 명령을 꼭두각시처럼 따라 한 일들이었다. 그리고 그 꼭두각시짓이 만든 역사는 지금도 대한민국 공화국을 독뱀처럼 죄고 있지 않은가...‘1000명 정원 사범대학 2개소와 320명 정원 의과대, 5400명 정원 기술학교 11개소가 필요하다. 이에 대한 교재를 검토했다.’(1946년 9월 7일) ‘누구를 공산당 지도자로 지명할 것인가에 대해 레베데프 사령관, 로마넨코 부사령관과 토의해야 한다.’(같은 해 9월 11일) ‘선거 규정을 9월 20~25일에 발표해 각 단위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한다.’ ‘최승희 무용학교 정원은 100명으로 한다.’(같은 해 9월 11일) 이상은 ‘빨치산 출신 북한 지도자’ 김일성이 내린 지시가 아니다. 이는 소련군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이자 군사위원인 소련 육군 중장 테렌티 스티코프가 내린 지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스티코프가 남긴 일기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김일성은 이 지시를 남김없이 그대로 이행했다...
꼭두각시에서 조작된 ‘주체’로-1947년 여름 레베데프는 모스크바에 새로운 국기 제작을 의뢰했다. 1948년 7월 10일 북조선인민회의는 모스크바에서 보내온 인공기를 새 국기로 제정했다.(이휘성, ‘태극기 삭제와 인공기 제정을 통해 본 북한의 역사 왜곡’, 2014년 6월 17일 ‘데일리NK’). 2013년 8월 8일 북한 ‘노동신문’은 ‘김일성이 국기를 완성시키며 애국자의 붉은 피와 단일민족과 조선 인민의 정신을 뜻한다고 설명했다’고 보도했다. 김일성이 인공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2018년 ‘조선중앙통신’은 1945년 평양 환영대회 김일성 사진을 디지털로 복원해 공개했다. 이 사진에는 김일성 가슴에 있던 소련군 적기훈장이 지워져 있다. 옷부터 연설까지 꼭두각시였던 김일성을 그 후예들이 ‘주체’와 ‘자주’의 민족 지도자로 상징조작한 것이다. 건국을 방해하고 완벽하게 전(前)근대 조선으로 회귀해 버린 해방 정국 북조선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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