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맹기 논평] ‘한번 공산당은 영원히 공산당’.
- 자언련

- 9월 26일
- 7분 분량
공산당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 자유주의는 공산당과는 전혀 다른 이데올로기이다. 생명·자유·재산의 헌법적 가치는 공산당과는 전혀 다른 체계인 것이다. 그 헌법정신을 두고, 엉뚱한 공산당 세계로 들어가는 리더십과 그 국민은 문제가 있다. 이승만 대통령과는 전혀 다른 인성의 소유자들이다.
조선일보 방극렬 기자(2025.09.26.), 〈'북 간첩 활동' 前 민노총 간부, 대법서 징역 9년 6개월 확정〉, 법원은 ‘한번 공산당은 영원히 공산당이다.’라는 사실을 두고 판결할 필요가 있다. 공산당은 꼼짝 못하게 당원을 가둔다. 그 가두리 망에서 벗어나는 일을 요원하다.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25일 북한의 지령에 따라 간첩 활동을 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기소된 석모 전 민주노총 조직쟁의국장에게 원심과 같이 징역 9년 6개월과 자격정지 9년 6개월을 확정했다.
석씨는 2018년 10월부터 2022년 12월까지 총 102차례에 걸쳐 북한의 지령을 받거나 보고문을 보낸 혐의 등을 받는다. 북한 문화교류국은 석씨가 세운 비밀 지하 조직에 민노총 장악 방법을 하달하고, 보수 정당과 언론을 ‘친일 집단’ ‘토착 왜구’로 몰아가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김정은은 ‘총회장님’, 북한 문화교류국은 ‘본사’, 비밀 조직은 ‘지사’라는 ‘은어’로 사용했다.
석씨는 또 2018~2022년 민노총 총파업, 대통령 선거, 이태원 핼러윈 참사 등을 전후해 ‘반미·반일 선동’ ‘촛불 집회 독려’ ‘윤석열 퇴진’ 등 구체적 활동 방향을 담은 지령을 받았고, 민노총 내부 공작 상황을 수시로 북한에 보고했다. 김정은 일가에 대한 충성 맹세문과 평택 미군 기지와 오산 공군 기지를 촬영한 사진도 북한에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1심은 석씨의 혐의 대부분을 유죄로 보고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했다.”
트루스데일리 조정진 대표기자 (09.15), 〈공허한 레토릭 끝판왕, 이재명의 ‘END’는 국가안보 종말〉,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 뉴욕 유엔 총회에서 발표한 이른바 ‘END 이니셔티브’는 겉으로는 참신해 보이는 구호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미 실패해 바닥이 드러난 김대중의 햇볕정책, 문재인 종북정책의 복사판에 불과하다. 교류(Exchange)·정상화(Normalization)·비핵화(Denuclearization). 세 단어의 조합이 무슨 새로움인가. 대한민국은 지난 30년간 같은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 그럼에도 북한은 단 한 번도 긍적적으로 응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핵무기와 미사일로 한반도와 동북아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냉혹한 현실을 외면한 채, 유엔 연단에서 북한을 향한 ‘짝사랑 편지’를 낭독하는 대통령의 모습은 대한민국 국민을 당혹스럽게 한다. 불법 대북송금 연루자가 비핵화를 말한다고? 이재명은 지금 유엔 대북제재 위반 의혹에 연루된 인물이다. 대북송금 사건으로 이미 국제사회의 감시망에 걸려 있다. 그런데 그가 유엔 총회에서 “북한 비핵화를 이끌겠다”고 외친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오히려 국제사회는 이렇게 비웃고 있을 것이다. “북한에 몰래 돈을 보내던 사람이 이제 와서 비핵화를 말한다니, 참으로 아이러니 아닌가.” 이것이 국제무대에서 한국 대통령이 자초한 민망한 현실이다. 북한의 대답은 언제나 ‘NO’였다. 대한민국은 30년 넘게 북한에 손을 내밀었다. 남북정상회담·경제협력·인도적 지원·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답은 한결같았다. 거부·기만 그리고 도발이었다. 최근에는 아예 공개적으로 “대한민국은 적대적 별개의 국가이며, 이재명과도 대화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관계 정상화’를 외친다? 이는 외교가 아니라 자기기만이다.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것이 차라리 덜 부끄럽다. 햇볕정책과 종북정책의 ‘짝퉁 3.0’.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북한의 변화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핵개발 가속이었다. 문재인의 대북정책은 북한의 평화쇼를 국제사회에 포장해 주며 시간만 벌어줬다. 이제 이재명은 ‘END’라는 새 포장지를 두르고 같은 길을 걸으려 한다. 그러나 국민은 더 이상 속지 않는다. 북한은 결코 달라진 적이 없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END 이니셔티브’는 단지 종북정책의 짝퉁 3.0에 불과하다.”
그 걸레를 갖고 언론은 매일 매일 빨고 있다. 그러나 걸레는 빨아도 걸레이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국민의힘은 부정선거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이젠 부정선거가 국회 본회의장까지 오염시킨다. 국민의힘도 걸레가 되고 싶은 것이다. 동아일보 주권형 기자(09.26), 〈국회 본회의 명패 수보다 1표 많은 표… 野 “부정투표” 반발〉, 자기들도 관리할 수 없는데, 선관위 맡긴다...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행동이다. “● 명패 수보다 투표수가 1표 많아… 野 “부정투표”. 민주유공자법 패스트트랙 지정 투표 중에는 투표수(275표)가 명패 수(274표)보다 한 표 더 나오면서 여야가 강하게 충돌했다. 송 원내대표는 우원식 국회의장에게 “어떻게 명패 수보다 더 많은 투표가 나올 수 있느냐. 이러니까 부정선거란 얘기가 나오는 것 아니냐”고 강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우 의장은 투표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재투표할 필요가 없다는 국회법 조항을 내세워 개표를 그대로 진행해 통과시켰다. 우 의장은 찬성 182표, 반대 93표로 집계됐다고 발표하면서 “명패 수 차이가 투표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므로 가결됐다”고 선포했다.”
자유는 자신과 조직의 정체성 찾는 노력의 결과이다. 동아일보 조동주·김지현 기자(09.26), 〈금융위 해체-금감원 분리. 하루 아침에 없던 일 됐다〉라고 했다. 그러나 정권에 붙어 계속 걸레빨이만 하던 검찰이 폐지된다. 금융위와 전혀 다른 결과이다. 동아일보 고도예·구민기 기자(09.26), 〈사정 정국 이끌던 ‘정권의 칼’..권력 남용 논란에 결국 폐지〉, 검찰은 대통령 한 사람 배출하고 조직이 사라지게 되었다.
AI 산업의 과제는 에너지와 AI 선진화이다. 조선일보 박상현 기자(09.26), 〈탈린(에스토니아) 풍력 낙원 에스토니아, ‘재생에너지 10% 정책 버리고 원전 택했다.〉, 〈’풍력·태양광 급히 늘리면 중국만 이득...에너지 안보 악영향‘〉이라고 한다.
AI 산업의 육성이다. 국회도 이젠 공산당 행세 그만할 필요가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노동봉투법, 주 52시간 노동제, 상법 개정, 최저임금제 등은 중국 식민지 선호 정책이다. 조선일보 채제우 기자(09.25), 〈"휴머노이드 로봇, 산업 현장서 대중화는 아직 갈 길 멀다"〉, “[WEEKLY BIZ] 라파엘로 단드레아 스위스 취리히연방공대 교수 "로봇이 가장 크게 변화시킬 산업은 물류업"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이 움직이는 영상을 만드는 것과 꾸준히 수익을 내는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입니다. 현재로선 휴머노이드 로봇의 대중화 가능성과 영향력을 판단하기 이르다고 봅니다.” 라파엘로 단드레아 스위스 취리히연방공대(ETH) 교수는 최근 WEEKLY BIZ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과 닮은꼴로 움직이는 모습이 화제가 된 테슬라의 ‘옵티머스’ 등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실제 산업 현장에서 얼마나 유용할지 미지수란 얘기다. 단드레아 교수는 로봇 자동화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이자 기업인이다. 그는 지난 2003년 물류용 로봇 기업 ‘키바시스템스(KivaSystems)’를 창업해 2012년 아마존에 7억7500만달러(약 1조원)를 받고 팔았다. 지금도 세계 최대 가구 업체인 이케아 등 글로벌 기업에 재고 관리용 자율 비행 드론을 납품하는 ‘베리티(Verity)’를 운영하고 있다.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과 함께 산업용 ‘AI 로봇’에 대한 기대가 나날이 높아지는 가운데, WEEKLY BIZ는 단드레아 교수와 로봇 산업의 현주소를 진단해봤다...-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결과적으로 인간의 삶은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로봇은 인간이 원하지 않은 궂은일을 대신할 것이고, 인간은 보다 의미 있고 만족스러운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봇은 인간에게 더 많은 자유를 줄 것이라고 예상한다.””
싼 임금 찾아 중국으로 가고, 신발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국가가 되었다. 동아일보 삼성 CSR 모바일 메거진, 〈삼성, 中企 스마트 공장 고도화 및 지능화 지원〉이라고 했다. 한편 동아일보 사설(09.26), 〈주 4, 5일제 시동..생산성 제고 없인 경제에 큰 짐 된다.〉라고 한다. 언론·종교의 자유 없는 곳에 죄의식이 있을 이유가 없다. 대한민국 공공직 종사자는 공산체제가 도래하면 어떤 사회현상이 일어날지 분명히 깨달을 때가 되었다.
중국 공산당의 폭력성은 대단하다. 그들에게 생명·자유·재산에 대한 기본권 개념이 없다.
트루스데일리 최민서 기자(09.26), 」아기 장기 사고 파는 中 ‘생명 금광’ 산업 실체 드러났다〉, “22일 피플뉴스 인용하자면, 국제 인권 감시단체인 파룬궁박해국제조사기구(WOIPFG)가 발표한 충격적인 보고서가 국제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WOIPFG 중국 공산당 군대의 아기 장기 적출의 충격적인 비밀’ 보고서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중국 군 병원 내 ‘아기 장기 이식’ 실험의 어두운 진실을 폭로했다. WOIPFG에 따르면 10여 년 전 중국 공산당 군 병원은 ‘아기 장기 이식’ 실험을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중난하이 최고위층 가족의 지지와 보호 하에 추진됐으며 결국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들의 수명을 최대 150세까지 연장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실제로 ‘우리에 갇힌 아기’라는 표현까지 쓸 정도로 암시장 이식 산업이 조직적으로 형성돼 운영된 정황이 드러났다. 특히 더욱 충격적인 점은 일부 아기 기증자가 인공수정을 통해 지정된 아기로 태어난 후 강제적으로 장기 이식에 이용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과정에는 주변 대학·병원·불법 대리모 단체까지 조직적으로 연관돼 있다.”
공산당 걸레들은 생각지도 않고, 중국·북한 공산당이 시킨 데로, 가두리 공작을 편다. 조선일보 서유근 기자(09.25), 〈재택근무는 없다...美 스타트업에 퍼지는 중국식 ‘996 근무’(오전 9시-오후 9시, 주 6일 근무〉, 중국 공산당은 대만과 같은 정책을 편다.
‘한번 공산당은 영원히 공산당이다.’를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개혁했다. 결국 계몽, 즉 끊임 없는 교육이다. 역사는 살아 움직임이지, 절대로 박제(剝製)가 되어서는 않된다. 좌익은 도시 개발도 박제의 이데올로기로 한다. 그러나 언론인 이승만은 전혀 달랐다. 그는 이데올로기 파괴 명수였다. 조선일보 전상인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09.26), 〈도시에서 '역사'와 '재생'이 잘못 만나면〉, “지난 몇 년 사이 덕수궁 돌담길 주변 모습이 확연히 달라졌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마치 ‘어두운 등잔 밑’ 같았던 정동 일대가 인파가 넘치는 ‘핫플’로 거듭난 것이다. 무엇보다 박원순 시정(市政)의 대표 브랜드인 도시 재생 사업 덕분이다. 도시 재생에는 다양한 수법이 있는데, 유독 정동 지역에는 역사를 자원으로 활용하는 전략이 구사되었다. 이곳에서 도시 재생과 역사 재생이라는 말이 혼용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결과, 많은 ‘역사 명소’가 새로 단장되었고 ‘역사 보행’ 네트워크도 크게 늘었다. 그곳 부동산 시장에서는 왕조 시대의 추억을 프리미엄 요소로 삼는 ‘궁(宮)세권’까지 형성되고 있다. ‘역사’와 ‘재생’의 만남 자체가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구의 경우 도시 재생 사업에서 주로 쓰이는 것은 건축 문화 유산이 아니라 공장이나 창고 같은 산업 유산이다. 그런 만큼 덕수궁 같은 국가지정문화재가 포함된 정동의 사례는 꽤 이례적이다. ‘정동 대한(大韓), 제국(帝國)에서 민국(民國)으로’라는 슬로건이 대변하듯 정동 일대 도시 재생 사업이 말하는 역사는 대한제국기다...그렇게 하고 싶은 심정은 이해가 간다. 영국, 러시아, 미국, 프랑스 등 열강들의 공사관이 밀집했을 뿐 아니라 배재학당이나 이화학당 같은 근대 교육 기관과 정동교회나 성공회 성당 등 서양 종교 시설이 처음 들어선 곳이 정동이기 때문이다. 독립신문사도 그곳에 있었고 서양식 근대 병원인 제중원도 거기에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붉은색 벽돌 건물이 상징하는 근대적 도시 경관이 최초로 형성된 곳이 바로 정동 일대였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대한제국의 ‘개혁 군주’ 고종이 염원한 ‘자주독립 국가’의 결정적인 징표는 아니다. 제국주의 시대 서양에서 이식된 역사적 형적(形跡)일 뿐, 고종의 적극적인 치적이라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고종 자신의 무능과 실정(失政) 또한 가볍지 않거니와 무엇보다 대한제국의 자주적 근대화는 국권 상실과 더불어 실패로 귀결하고 말았다...더군다나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 땅에서 진행된 ‘근대화의 길’과 관련하여 정동 일대만 특권화될 이유는 없다. 실제 역사로 말하자면 ‘정동 근대화’ 이외에 ‘신촌 근대화’도 있었고 ‘낙산 근대화’도 있었다. 만약 정동을 ‘자주적 근대화’의 공간적 상징이라 주장한다면 신촌은 기독교에 바탕을 둔 ‘서구식 근대화’의 요람이었다. 그곳에는 미션계 고등 교육 기관으로 선진 문물이 직수입되었고 경의선 개통 이후 철도역을 중심으로 근대 상업 문화가 번성하기도 했다. 한편, 낙산 아래 동숭동이나 혜화동 쪽은 ‘식민지 근대화’의 정신적 산실이었다. 제국대학이 자리 잡았으며, 관립 근대 의학 및 의료 기관도 들어섰다. 그 이면에서 근대 문화 및 예술이 싹튼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한편 독립신문의 근대사의 소프트 노하우는 이승만 대통령의 Japan Inside Out (1941)『일본의 가면을 벗긴다.』에서 그 실체를 잘 설명했다. 말 바꿔가면서 선전·선동·진지전 프레임 구축하는 박원순·이재명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다. 이승만은 서문을 이렇게 시작했다. “한국은 4천 년 이상 동양문화의 높은 수준을 만끽했다. 평화는 철학, 정치 그리고 시(詩 )등에서 국가를 선도하는 지배원리였다.(이승만, 1941: 8) 일상생활에서 편안하고, 안락한 가족의 언어로 표현하다. 그 국가의 기원은 2317 B.C. 단군에 의해 주어졌고, 1122년에는 기자 조선에 의해 다시 새롭게 하면서 평화의 나라(the Morning Calm)가 되었다.
아침 인사도 ‘안녕하십니까“ 그런 문화에서 성장하고, 길러진 나는 자연적으로 평화의 전도사이다. 그러나 일본은 다르다. 서구의 군사의 정복 사상 그리고 우월한 현대 전쟁의 무기 유입으로, 서구문명에 앞서간 일본은 충실한 모범생으로 현대식 장비와 서구의 군국주의 정신으로 무장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까운 이웃으로 잘 지내자고 했다.
세계의 모든 국가는 힘이 있든 없든 문을 활짝 개방했고, 그들은 자신의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국제볍과 자신국제법과 국제조약을 준수하게 된다.(이승만, 1941: 9) 일본은 의심하지 말고, 우리를 믿으라고 설득했다. 보수적 조선정부는 이 조약에 어린이 같은 심정의 신뢰로 국가 방위를 준비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일본에 개방했다. 물론 선진된 권력은 시대의 요구를 에 맞게 보호해줄 것을 약속했다. 조선에 대해서는 1895년 청일전쟁 끝나고 곧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위험을 감지하고, 나라가 독립적 생존에서 절박한 위험을 전하는 일에 전념했다.(이승만, 1941: 9)
나는 24세 때 최초의 일간신문(매일신문, 1898년 4월 9일)을 발간하여, 칼럼 지면을 통해 일본과 러시아의 두 강대국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백성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많은 애국 동지들과 협력해서, 우리는 국가 방어의 프로그램을 시작함에 있어 충분히 많은 사람을 참가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일에 성공을 거두었다.(이승만, 1941: 9)
불행하게도 수구파 정부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의 국민운동을 정부가 억압하려했다. 수구파와 개화파 간의 오래동안 갈등으로 수구파는 개화파를 탄압하는 데 성공을 했다. 그 결과 다른 많은 동료과 함께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고, 나는 거의 7년 동안 영어의 몸이 되었다.
잠시 개화파가 득세하는 시기에 이승만은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상태였고, 일본은 조선을 삼킬 비수를 사용하고 있었다. 일본은 벌써 가능한 모든 출구를 막고, 외부 세계와 직접 호소할 수 있는 길을 차단했다. 개화파는 내가 일본을 대항해 중재권 행사를 하는 할(use its good offices) 뜻으로 미국에 파견하기를 원했고, 그리고 이승만도 그 길을 택하게 됨으로써 1904년 11초에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다. 그는 일본 모르게 민영화(閔泳煥)과 한규설(韓圭卨)의 밀서를 소지했다.
자연적으로 당시 지식인이 갖고 있었던 정서를 미국인에게 전하기로 노력했다. 1905년 미국인의 대부분 사람들은 10년 전 한국 사람들처럼 상황을 잘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승만, 1941: 10) 몇 유능한 엘리트들은 그 사실들을 알리려고 했지만, 일반적 감정은 전적으로 친일적 정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 감정에 일본의 본심을 알려봤자, 허황된 이야기로 들릴 것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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