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맹기 논평] 386 운동권 세력의 몰골.
- 자언련

- 2023년 10월 28일
- 7분 분량
국내 좌익세력들은 뭘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북한·중국 자유가 없는 공산국가를 원하는 것인가? 민족의 앞날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 궁금하다. 당장 그들은 부정한 방법, 폭력과 테러로 돈과 권력을 얻을 수 있다. 그 다음은 김정은 체제 밑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그 길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그걸 감지하고, 바른 길로 갈 필요가 있다. 지금과 같은 386 운동권 세력의 몰골은 갈수록 추해진다.
북한이 설명되었다. 조선일보 이하원 논설위원(2023.10.25.), 〈만물상-목선과 목탄차의 나라〉, “▶북한의 도로는 도로라고 부르기도 힘들다. 북한 도로 총연장은 한국의 약 4분의 1 수준이라고 하나 대부분 왕복 2차선이고, 무엇보다 포장률이 10%도 안 된다. 한국 사람은 차를 타도 그 길을 30분도 못 갈 것이라고 한다. 철도와 도로가 엉망이어서 200km 가는 데 3~4일이 걸린다. 여행자유도 없어 먼 지역에 사는 부모, 자식은 사실상 이산가족과 다름없다. 부모 사망 소식을 듣고 집에 도착하면 장례식이 끝났다고 한다. 고속도로는 특수 계층만 이용한다. ‘평양의 영어 선생님’의 저자 수키 김은 평양과 묘향산 간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차를 한 대도 보지 못했다고 썼다. ▶뗏목 같은 목선과 목탄차는 이제 아프리카에서도 보기 쉽지 않다. 북한 체제가 뒤를 향해 달리는 것은 김정은이 핵·미사일에만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 체제를 고발한 뮤지컬 ‘요덕 스토리’에 기독교의 주기도문을 패러디해 절규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남조선에만 가지 마시고 이곳 공화국(북한)에도 찾아오소서.” 김정은 일가를 제외한 우리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동아일보 정임수 논설위원(10.25), 〈中에 삼성반도체 복제공장이?〉, 중국의 제조업이 고개되었다. “애플의 위탁생산업체인 대만 폭스콘이 2018년 10조 원 이상을 투자해 중국 주하이에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는 청사진을 발표했다. 국내외 반도체 관련 기업 60여 곳을 현지로 초청해 사업 설명회까지 열었다. 이 과정에서 공장 설립을 돕는 컨설팅업체가 ‘진세미’라는 게 알려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서만 28년간 일하며 ‘반도체 공정(工程)의 달인’으로 불리던 최모 씨가 2015년 싱가포르에 설립한 회사였다. ▷최 씨는 18년 몸담은 삼성전자에서 한 번 타기도 힘들다는 삼성그룹 기술대상을 세 번이나 탔다. 2001년 옮겨간 하이닉스에선 빚더미 애물단지 회사를 세계 D램 2위 업체로 끌어올리며 사장 후보까지 올랐다. 국내 반도체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은탑산업훈장도 받았다. 그런 그가 중국, 대만 등 해외에서 컨설팅을 해주며 현지 반도체 공장 가동에 기여한다는 소식에 퇴직한 고급 인력을 우리가 활용해야 한다는 말들이 나왔다. ▷돌연 최 씨의 구속 소식이 들려온 건 올 6월이다. 2018년 중국 시안의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불과 1.5km 떨어진 곳에 이 공장을 본뜬 ‘복제 공장’을 지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공장 BED(반도체 클린룸 최적화 기술), 공정 배치도, 설계 도면 등을 대거 빼돌렸다고 한다...▷시안 공장에 8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던 폭스콘이 발을 빼면서 공장 설립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최 씨는 청두로 눈을 돌렸다. 2020년 청두시에서 4600억 원을 투자받아 반도체 합작회사를 만들고 공장까지 세운 것이다. 그런데 이 공장에서 개발한 20나노급 D램 반도체에 삼성의 핵심 기술이 활용된 정황을 최근 경찰이 포착했다고 한다. 다행히 최 씨가 구속되면서 양산은 못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삼성의 ‘준(準)복제 공장’쯤 생긴 셈이다. 넋 놓고 있다가는 중국에 첨단 기술과 인력들을 다 빼앗길 판이다. 산업 스파이를 간첩죄에 준해 엄벌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 북한·중국 닮기 위해 국회와 현재는 눈물겨운 투쟁을 한다. 프롤레타리아혁명? 동아일보 장은지·김은지·권구용 기자(10.27), 〈헌재 “노란봉투법-방송3법 직회부 적법”… 민주당 “내달 9일 예정대로 본회의 상정”〉, 민주당은 노조 권력확대, 방송 영구장악 획책을 한다. 그게 자유주의, 시장경제 헌법정신에 맞을지 궁금하다. 헌재는 대한민국 제도권인지, 북한 헌재인지 궁금하다.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한 ‘노란봉투법’과 ‘방송 3법’의 국회 본회의 직회부 과정이 적법했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민주당은 앞서 예고한 대로 다음 달 9일 예정된 국회 본회의에서 이들 법안을 상정해 처리할 방침이다. 헌재는 26일 오후 국민의힘 소속 법제사법위원회 국회의원들이 전해철 전 국회 환경노동위원장과 국회의장을 상대로 낸 권한쟁의 심판 청구를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기각했다. 노동자 파업에 대한 사측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 3조 개정안)에 대한 전 전 환노위원장의 본회의 직회부 요구가 적법했다는 것이다. 국회법은 법안이 법사위에 ‘이유 없이’ 계류된 지 60일 이상 지나면 소관 상임위 재적위원 5분의 3 이상의 찬성으로 본회의 회부를 요구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민의힘 소속 법사위원들은 “정상적 심사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이유 없이 계류된 게 아니고 이에 따라 본회의 회부를 요구할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헌재는 “법사위는 체계 자구 심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볼 수 없는 절차 진행을 주장하면서 절차를 지연시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날 헌재는 방송 3법(방송법 방송문화진흥법 한국교육방송공사법 개정안)의 본회의 직회부 과정에도 위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386 운동권 세력들은 언제부터 그 짓을 한 것인가? 이젠 막까 놓고 부정선거에 눈을 돌린다. 언론이 중국·북한과 같이, 선전·선동·진지전 구축하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 그래서 노란봉투법, 방송영구장악법이 필요한 것이다. 그 인생들 불쌍하다. 이젠 그길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그들 자식들에게 그런 교육을 강요한다면 반성할 일이다. 이젠 자식들 두고, 중국·북한 가서 살아야 될 사람들이다.
스카이데일리 홍찬식 언론인·칼럼니스트(10.25), 〈박정희와 대학생 운동권의 ‘기묘한 동거’〉, “필자는 1970년대 중반 대학에 입학했다. 캠퍼스 교문에서 학생회관으로 가는 길목에 별로 크지 않은 공원이 있었는데 그곳을 지날 때마다 학생들이 꽹과리·장구·북 등을 치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그 부근이 농악 동아리의 연습 장소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도시에서 성장한 탓인지 요란한 농악 소리가 처음에는 듣기 거북했지만 점점 그 신명에 익숙해져 갔다. 1970년대 대학 문화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민속 문화’였다. 하찮고 낡은 것이라고 버려두었던 ‘우리 것’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농악 말고도 판소리·탈춤·국악도 있었는데, 탈춤이 단연 인기였다. 대학 밖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민속 문화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사업이 활발했다. 1974년부터 1978년까지 제1차 문예중흥 5개년 계획이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시행됐는데 전체 예산의 70.2%가 민속 문화 쪽에 투입됐다.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라는 행사가 스포츠 분야의 전국체전처럼 전국을 순회하며 개최됐다. 전국 곳곳에 숨어 있는 민속놀이와 민속예술을 발굴해 선보였다. 누가 최고상을 받느냐를 놓고 대중의 관심이 집중됐다. 요즘 지자체마다 빠지지 않는 지역축제가 민속예술제의 형태로 처음 시작된 것도 그즈음이었다...1968년 한 행사(제2경제 운동 국민궐기 대회)에서 그는 “제2경제 운동은 모든 국민이 민족적 주체의식을 확고히 하자는 운동이요, 미래에 대한 밝은 비전을 갖고 새로운 정신 자세로 경제 건설에 박차를 가하자는 운동”이라고 밝히고 있다. 민속 문화를 계승하고 부각하려는 이유가 경제적 관점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드러냈다. 우리 스스로 문화 민족이었다는 자긍심을 가져야 과거의 패배 의식에서 벗어나 경제 발전을 이뤄낼 수 있다는 철학이 깔려 있었다. 반면에 1970년대 대학가의 민속 문화 열풍은 체제에 대한 저항 수단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탈춤의 경우 과거 지배계층 비판과 민중 의식을 담은 연희이므로 대학생들이 탈춤을 통해 민족 주체의식을 높이면서 민중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이념이었다...요즘 좌파들의 집회가 ‘문화제’를 앞세우는 것에서도 그때의 유산이 남아 있다. 둘 다 동일하게 ‘민족 주체의식’을 말했지만 한쪽은 ‘경제’, 다른 한쪽은 ‘민중’을 위한 것으로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이었다...이 두 가지 길의 성패는 이미 결론이 내려져 있다. 한국은 1970년대의 가난에서 벗어나 세계 10위권의 경제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현대의 한국인 대다수는 그때 뿌려진 문화적 자존감 위에 서 있다. 민속과 전통 문화에 눈을 돌려 그 힘으로 경제적 돌파구를 찾으려 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시도는 뜻을 이뤘다. 문제는 운동권의 성적표다. 이들이 꿈꾸는 세상에 대해 주사파 이론가였다가 전향한 민경우는 ‘소박한 농촌공동체’라고 정의했다. 1990년대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자 운동권은 큰 충격에 빠졌다가 같은 사회주의 국가이면서도 아직 건재한 중국과 베트남의 사례에서 ‘대안과 희망’을 찾았다고 한다. 중국 모택동의 ‘사람 중심’ 사상이나, 북한의 주체사상이 이런 공동체를 모델로 삼은 점에 주목했다는 것이다. 그 공동체라는 것이 썩 여유롭지는 못해도 골고루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말한다면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설명이다. 젊은 날의 민속 문화에 대한 이념적 열기가 이들에게 그 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이런 전근대적인 단계를 훨씬 지나쳐 와버렸고 이제 와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이런 사회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는 걸 다들 알고 있다. 그동안 우리의 민속 문화는 아쉽게도 그때를 정점으로 대중의 시선에서 멀어져갔다. 관객들로 북적이는 공연장에서 민속과 전통문화와 관련된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어쩔 수 없는 흐름일 수도 있고 그럴수록 획기적인 지원이 필요한 측면도 있다. 이와는 별개로 운동권의 ‘몽상’은 그 형태를 바꿔가며 여전히 진행형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여러 비극이 여기서 비롯되고 있다.”
필자가 출간한 2004년 판 ‘커뮤니케이션의 역사’ 140 페이지를 소개한다. 구텐베르크 활판인쇄술이 발전된 당시의 상황이다. ‘우리민족끼리’는 독서하는 대중으로 발전시킨 것인지 궁금하다. 분명 새로운 인쇄술은 시간의 통제, 성경 읽기 그리고 민족주의와 연관이 있다. “전문화된 지식이 체계적으로 보급되고, 상공 계층이 등장하였다. 글 읽은 상인들이 등장한 것이다. 구텐베르크(Johann Gutenberg)는 정보욕구의 충족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는 1455년 활판인쇄를 사용하여 달력과 성경을 출관하였다. 인쇄 문화의 발명으로 루터는 1517년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문자해독, 교육 확산 등을 부추겨 종교적·도덕적 사회변혁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혁신으로 개인에게 종교적 체험과 사적 헌신의 과제가 주어졌다. 개인은 중세의 존재 사슬(Chain of Being)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갈구하게 되었다. 인간 심연의 실존적 차원을 형성하는 자아만을 위한 공간이 마련된 셈이다. 라틴어 대신에 지역어인 독일어 성서가 번역되면서 독일 내세널리즘이 태동하였다. 국가마다 자신들의 방언으로 출판업을 확장시켰다.”
이런 논리는 안창호·김형석 교수가 오랜 전에 펴온 논리이다. 386 운동권 세력의 몰골에 딱 맞는 해결책이다. 중앙일보 백성호 종교전문기자(2023.10.27.), 〈17세 때 만난 도산 안창호…104세 김형석, 그때 인생 바뀌었다〉, “독립운동가 도산(島山) 안창호 선생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8년에 옥사했다. 85년 전이다. 그러니 도산 선생을 직접 만났던 이들 중에 지금 살아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104세 철학자’ 김형석(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김 교수의 어릴 적 꿈은 기독교 목사나 신학자였다. 그런데 17세 때 도산 선생의 설교를 눈앞에서 듣고서 삶의 방향을 틀었다. 그는 철학을 중심으로 신학과 역사학, 문학과 예술까지 아우르는 ‘인문학자’가 되고자 했다. 무엇이었을까. 기독교인인 도산의 어떤 면모가 어린 김형석에게 삶의 방향을 바꾸는 나침반이 되었을까...김형석은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를 중단한 이력 때문에 교무실에 불려가 일본인 담임에게 뺨이 시퍼렇게 되도록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울하고 답답한 시절에 도산 선생이 그가 다니던 평양 송산리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게 됐다. “당시 도산 선생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었다. 건강 악화로 잠시 가석방된 상태였다. 도산 선생의 고향이 제 고향에서 7~8㎞쯤 떨어진 곳이었다. 요양차 고향에 온 도산 선생이 송산리**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기로 했다. 비밀리에 진행됐다. 가석방이지만 일본 순사의 감시는 계속됐다.”도산의 설교는 어땠나. “나는 그동안 교회에서 주로 목사님들의 설교만 들었다. 야트막한 야산만 보다가 비로소 큰 산을 본 느낌이었다. 도산 선생은 아주 높은 산이었다.” 왜 그렇게 느꼈나. “목사님들은 설교할 때 주로 교회 이야기만 했다. 교리 중심의 교회주의다. 도산 선생은 달랐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도 서로 사랑하자’며 진리를 이야기했다. 예수님도 진리를 이야기했지, 교회 걱정은 하지 않았다. 도산 선생은 설교에서 민족과 국가,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했다.”
김형석 교수는 "도산 선생은 아주 큰 산이었다. 교회에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는 야트막한 산만 봤는데, 도산 선생의 설교를 들을 때는 큰 산을 보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인문학적 소양이 있는 사람은 교회주의를 넘어선다. 문학이나 철학, 역사를 공부하면 기독교 신앙을 인간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양심적으로 판단하니까 교회주의를 뛰어넘게 된다. 반면 문학도 철학도 역사도 모르는 사람은 교회 안에 머문다. 진리가 신앙이 아니라 교리가 신앙이 되고 만다. 결국 교회주의에 빠지게 된다.” 교수님은 25년간 일제 강점기를 사셨다. 우리는 일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나 같은 세대의 사람에게 일본과 손잡자고 하면 참 힘들다. 그렇게 힘들지만, 그래도 미래를 위해서 나가야 한다. 원수를 갚겠다고 하면 우리도 결국 마찬가지가 되고 만다. 악은 더 큰 악을 낳고, 그건 또 더 큰 악을 낳는다. 우리가 더 높은 수준의 인격으로 마음이 좁은 일본을 불쌍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도산 선생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도산 선생은 뭐라고 말했나.
“일본을 타도하자고 하지 않았다. 원수를 갚자가 아니었다. 앞으로 일본과 동등하게 살아야겠다고 했다. 우리도 다시는 식민지가 되지 말고, 뚜렷하게 국가를 가지고 살아야겠다고 했다. 그걸 위해 나라 밖에서는 항일 무장 투쟁을 했고, 나라 안에서는 모든 면에서 일본을 앞서자는 애국 운동을 했다. 도산 선생은 지금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이 일본 사람보다 더 높아지자고 했다. 더 높은 수준의 대화를 하고, 더 높은 수준의 신앙을 갖자고 했다.” 김형석 교수는 “일제 시대에는 그렇게 애국을 했다. 해방 후에는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한국이 성장했다. 그럼 앞으로는 어떤가. 우리가 모든 면에서 일본보다 더 앞서고, 더 발전하고, 더 높아지면 된다. 그게 도산 안창호 선생이 평생 그리던 꿈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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